[김종성 기자]
1950년 6월 25일, 미국은 국제연합(유엔) 결의가 있기도 전에 즉각적 지원에 나섰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군사편찬위원회)가 1987년에 펴낸 <한국전쟁>에 따르면, 미국이 탄약 290만 발을 지원한 것은 발발 당일이다. 다음날인 26일에는 미국이 전방지휘연락장교단을 파견하고 미 의회가 5천만 달러 원조안을 통과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 정부는 서울을 버렸다. 위 책의 설명이다.
"26일 의정부가 북괴군의 수중으로 넘어간 이후 창동 방어선마저 위태롭게 되어 의정부 일대의 피난민이 서울로 몰려들기 시작하면서부터 3부 각 기관과 서울시민들은 동요를
바다신게임 일으키기 시작하여 긴급조치를 시행할 시간의 여유조차 가질 수가 없게 되었다. 이러던 중, 27일 03시 경무대에서 열린 제3차 비상국무회의에서도 실효성 있는 대책은 세우지 못한 채 다만 정부를 수원으로 이전시킨다는 방침만을 결정하였으며"
정부가 서울을 버리는 상황은 누구보다 서울시장을 당황케 만들었다. 수도 서울을 버리는 일은 어떻게 보
오리지널골드몽 면 대통령보다 서울시장에게 더 부담스럽다.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관할 지역의 일부를 버리는 것이지만, 서울시장의 입장에서는 전부를 버리는 것이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고 했던 이기붕
황금성게임랜드 ▲ 이기붕과 아내 박마리아
ⓒ 연합뉴스
난감한 상황에서 이기
온라인골드몽 붕이 내린 결론은 생을 마감하는 것이었다. 정부수립 직후에 이기붕과 함께 대통령비서실에서 근무한 박용만 전 신민당 국회의원(1924~1996)의 회고록에 이런 사실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박용만은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와 번번이 충돌하다가 비서실에서 쫓겨난 뒤 자유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던 중에 이기붕의 독주에 반발해 탈당
릴짱릴게임 했다. 박용만은 이기붕을 잘 아는 인물이자, 이기붕을 미화할 이유가 없는 인물이다. 그런 박용만이 1965년에 펴낸 <제1공화국 경무대 비화>에 따르면, 시민들을 버리고 피난을 가게 된 상황을 만송(晩松) 이기붕은 부담스러워했다.
"많은 서울시민들은 남하할 겨를조차 없었다. 시장이던 만송도 남하하는 정부를 따라 많은 시민들을 버려둔 채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때 만송의 심정은 매우 복잡했었다."
1949년 9월 1일 공보처가 발간한 <제1회 총인구조사 결과 속보>에 따르면, 그해 5월 1일 당시의 남한 인구 2018만 8641명 중에 서울시민은 144만 6019명이었다(<동아일보> 1949.10.14). 유령 인구가 많던 때라 실제의 서울 인구는 더 많았고, 인구이동이 활발한 때라 1년 뒤의 서울 인구도 더 많았다.
그런 서울 인구 대다수는 전쟁 발발 당시 한강 이북에 거주했다. 이때 서울을 탈출한 뒤 이듬해에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하고 서울시 기획관리관·도시계획국장·내무국장 등을 지낸 손정목(1928~2016) 전 서울시립대 교수의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제1권은 "전쟁이 일어날 당시의 서울 인구는 150만이 조금 넘었고 그중 10분의 1인 15만 명은 한강 남쪽(영등포구)에 살고 있었다"고 말한다.
한강 이북의 약 140만 중에서 '해방 이전부터 서울에서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았던 사람들' 대다수는 피난을 가지 못했다. 위 책의 설명이다.
"한강 북쪽에 살고 있던 140만 명 중 한강을 건너 피난을 간 사람은 약 40만 명이었다고 하며, 그중 80%는 광복 후 월남자들이었고, 나머지 20%, 약 8만 명은 고급 공무원, 자본가, 우익계 정치인, 군인·경찰관 가족이었다."
이 시절의 군인·경찰은 월급은 많지 않았지만 희소성이나 사회적 지위가 지금에 비해 훨씬 높았다. 경제적 혹은 사회적으로 이들보다 형편이 나았다고 보기 힘든 한강 이북의 대다수 시민들은 꼼짝없이 발이 묶였다. 김일성이 싫어서 월남한 약 32만의 이북 출신들은 "서울에 남아 있다가는 죽는다"는 공포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일반 소시민들보다 빨리 움직였다.
평범한 서울시민 대다수가 피난 갈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은 서울시장 이기붕을 부담스럽게 만들었다. '서민시장'이라는 칭송이 있었기에 그의 부담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제1공화국 경무대 비화>는 "항상 민정을 보살피면서 서민 속에 파고들었기 때문에 서민시장이란 별칭을 받았을 만큼 덕망이 높았다"라고 평가한다.
이기붕은 '유리 멘탈' 같은 심성을 보일 때가 있었다. 1956년 5·15 부통령 선거 때 진보당 후보 박기출의 사퇴로 민주당 후보 장면에게 표가 몰려 낙선한 그는 크게 상심했다. 6월 8일의 민의원의장(국회의장) 당선으로도 상심을 달래지 못한 그는 두 달 가까이 국회에 출근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8월 1일 국회에서 사직 권고안이 제출되기도 했다. 1959년 1월 9일 자 <조선일보>는 그의 성격을 이렇게 정리했다.
"만송 이기붕 씨는 본시 온유하고 겸손한 서민이었다. 남 같이 악착스럽지 못한 그는 죄의식과 강박관념이 마음을 쥐어뜯으면 못 견디게 혼자서 괴로워하는, 말하자면 그러한 인간 타잎에 속한다."
시민들을 버리고 떠나야 하는 상황에서, 이기붕은 부인 박마리아에게 생각을 밝혔다. <제1공화국 경무대 비화>에 따르면, "내가 시장 된 몸으로 나 혼자 살겠다고 시민들을 버린 채 도강해서야 되겠소?"라는 말이었다. 박마리아는 공감을 표했다.
그러나 박마리아는 남편의 그다음 말에는 얼른 공감하지 못했다. "여생을 더럽히며 오래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깨끗하게 죽는 편이 좋지 않겠소?"라는 말이었다. 부인은 10대 초반인 두 아들의 존재를 환기시키며 반대했지만 결국은 동의하게 됐다고 위 책은 설명한다.
이기붕은 전 보사부장관 손창환(1909~1966)을 찾아가 두 아들을 부탁한 뒤, 집으로 돌아가 두 아들에게 손창환을 찾아가라고 일러뒀다. 그런 다음, 부인과 함께 한강을 건너 노량진 쪽을 향했다. "노량진에 나온 만송 부부는 노량진 수도배수지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라고 위 책은 말한다. 지금의 한강대교 남단에 있는 노들나루공원을 찾아갔던 것이다. 거기서 한강을 바라보며 서울시장답게 생을 마치겠다는 그의 결행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얄궂게도 죽음의 신이 만송 부부를 불러들이기에는 아직 시간이 일렀든지 두 분은 자결하려다가 주위 사람들의 만류로 자결을 못 하고 말았다."
한강 다리 끊기기 전에 도망친 서울시장
▲ 평화재향군인회와 한국전쟁유족회가 2009년 6월 28일 오전 서울 한강대교 아래 노들섬 부지에서 한강 인도교 폭파 희생자 합동 위령제를 올리고 있다. 한국전 발발 이틀 후인 1950년 6월 28일 새벽 수많은 피난민이 한강 인도교 남하 이동 중 예고없이 다리가 폭파됨에 따라 500~800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 연합뉴스
그런 극단적 방식이 아니더라도 서울시장의 책무를 다할 수 있었다. 시청을 끝까지 사수할 수도 있었고, 민병대라도 조직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굳이 한강변까지 갔던 이기붕은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듣고 생각을 접었다. 그런 뒤, 6월 28일 새벽 2시 40분경에 한강 다리가 폭파되기 이전에 피난길에 올랐다.
이승만 정권은 서울을 무책임하게 버린 일로 인해 무책임한 정권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됐다. 1952년과 1954년의 불법 개헌이 아니었다면, 이 정권은 두 번 다시 경무대 근처에 얼씬거리기도 힘들었다.
서울시장 이기붕만이라도 서울을 책임졌다면 정권의 이미지가 조금은 달라졌을 것이다. 처음에는 과도한 방식으로 책임을 다할 듯이 했던 그는 한강 다리가 끊기기 전에 신속히 대피하는 어이없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1960년 4월 28일에는 정말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국민들의 단죄를 피하고 제1공화국 청산 작업을 방해했다. 죽을 자리와 살 자리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수도 서울을 지키는 일에 대한 최소한의 성의도 보여주지 못하는 정권이 나라 전체를 떠맡은 것은 대한민국의 불행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 서울 책임자와 대한민국 책임자의 모습은 둘 다 어이없었다. 이승만을 옹호하는 극우세력은 해마다 3월 26일에 이승만을 찬미하며 생일잔치를 열지만 그 정권의 허상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 다 노출됐다.